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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인물

팔달산 서장대 오르는 길 고향의 봄 홍난파 노래비

by 트립로향 2022. 12. 10.

팔달문 관광안내소에서 서장대로 오르는 길 계단 옆에 홍난파 노래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노래비 앞면에는 어린 시절 자주 불렀던 '고향의 봄' 노래 가사가 적힌 악보가 붙어있으며, 뒷면에는 수원 출신 홍난파 선생이 태어난 지 70년 해를 맞이하여 수원 시민의 날 행사인 화홍문화제 때 홍난파 노래비를 세운 것이라는 내력이 적혀있습니다. 

 

 

홍난파 출생과 사망 그리고 서양 음악 공부

작곡가 홍난파의 본명은 홍영후이며 태어날 당시 수원군이었던 화성시 남양읍 활초리에서 1898년 태어났습니다. 1941년 지병인 늑막염이 악화되어 44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1910년 황성기독교 청년회(YMCA) 중학부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서양음악을 접했으며, 미국과 일본으로 유학의 길에 올라 일본 관립 도쿄 음악학교와 도쿄 고등 음악학원에서 음악공부를 했으며, 미국에서는 시카고 셔우드 음악학교를 나왔습니다. 유학을 마친 뒤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1937년 1월 이후에는 경성 중앙방송국 방송 관현악단 지휘자로 활동했습니다.

 

홍난파  업적과 작품 활동

우리나라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 최초의 기악곡을 작곡한 작곡가, 우리나라 최초의 관현악단 지휘자,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잡지 '음악계'  발행인으로 한국 음악사에 서양음악의 선각자로 짧은 생애에 비해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문학적인 재능도 보인 예술인이었다고 합니다. 대표작으로는 봉선화, 성불사의 밤, 옛 동산에 올라, 봄처녀, 고향의 봄.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처녀혼, 비겁한 자, 새벽종 등이 있습니다. 음악평론가로도 활동했으며 한국의 슈베르트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홍난파 친일 행적

미국 유학 도중 흥사단에 가입한 일로 인해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8월에 석방된 뒤 전향 성명을 발표하고 친일의 길을 걷게 됩니다. 정의의 개가, 공군의 노래, 희망의 아침, 순정의 꽃장사 등을 작곡하고 지휘자로서 방송을 통해 군국가요를 보급하는 한편 조선 총독부의 관변단체인 조선 문예회와 조선음악협회 그리고 전쟁 협력단체인 국민총력 조선연맹 문화부에 가담하여 일제의 전쟁동원과 황국신민화 정책을 선전하는데 일익을 담담했다고 합니다. 일제하의 친일 반민족 행위로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과 대통령 소속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에 이름과 행적이 수록되어있다고 합니다.(홍난파 노래비 옆에 세워진 안내판에서 발췌)

 

홍난파-노래비-친일행적-안내판-사진
홍난파 노래비 친일행적 안내판

 

●홍난파 노래비 흉상 도난사건

1974년 6월에 홍난파 노래비 흉상 도난사건이 발생하여 홍난파 노래비에 부착된 홍난파 선생의 흉상(직경 30cm)과 노래비라고 적혀있는 글자 중에서 가운데 글자 '래'자를 제외하고 '노'자와 '비'자가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얼마 후 범인이 잡혔는데 떼어간 물건을 고물상에 팔아먹은 좀도둑이었다고 합니다. 그 뒤 복원사업이 진행되었다고 하는데  노래비 글자는 보이는데 지금도 흉상은 보이지 않는군요.

 

흉상-도난-홍난파-노래비-사진
흉상 도난 홍난파 노래비

 

홍난파 생가와 홍난파 옛집

홍난파 선생이 태어난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활초리 생가는 1986년에 방 2칸 마루와 부엌이 있는 4칸 규모의 초가로 복원되었으며, 홍난파 선생의 서울 종로구 홍파동의 옛집 주변은 공원이 되었으며 홍파동 집은 문화재청의 근대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포스팅을 마치며....

우연히 팔달산 서장대로 오르는 길에 홍난파 선생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훌륭하신 홍난파 선생이 수원사람이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학창 시절 많이 불렀던 옛 동산에 올라, 고향생각, 봉선화등 서정적인 우리 민족 가곡들을 작곡한 홍난파 선생이 친일 반민족 행위를 한 사람이었다니 우리가 모르는 사연들이 있겠지만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슬픈 역사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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