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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

덕수궁 중명전 을사늑약 치욕의 현장

by 트립로향 2022. 10. 6.

덕수궁 중명전 을사늑약 치욕의 현장

덕수궁 중명전의 본래 이름은 수옥헌이라 불렀으며 1906년경부터 중명전이라 바꿔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덕수궁 중명전은 대한제국 시기 격동의 중심에 있었던 장소로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된 치욕의 현장이며 강제 체결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세계 방방곡곡에 알리기 위해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이 밀사를 파견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대한제국 시기 12년 320일

대한제국은 대한국 또는 구한말이라고도 말하며 대한제국 시기는 고종이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을 선포한 날로부터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당해 주권이 일제에 넘어간 날까지 12년 320일간을 말합니다. 대한제국은 조선을 계승한 국가이며 한반도의 마지막 군주국가입니다. 고종은 대한제국 선포 후 여러 개혁을 통해 근대화를 추진하였으며 자주적인 국가가 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제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당하고 1910년 경술국치로 인해 대한제국은 강제로 일제에 병합되었습니다. 한국사의 마지막 군주국인 대한제국은 이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5000여 년간 지속되어 왔던 군주제도 막을 내렸습니다.

 

덕수궁 중명전은 황실도서관 본래 이름은 수옥헌

덕수궁-중명전-정면-사진
덕수궁 중명전

 

중명전 일대는 본래 서양 선교사들의 거주지가 있던 자리였는데 1897년 고종은 아관파천을 끝내고 법궁인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덕수궁으로 환궁하면서 270여 년간 방치되었던 덕수궁을 황궁으로 조성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사를 시행했습니다. 이때 이 지역이 궁궐 터로 편입되었습니다. 1899년 최초로 지어진 중명전은 1층 서양식 건물로 황실도서관으로 사용되었으며 그 당시 명칭은 수옥헌이였습니다. 1901년 화재로 전소된 후에 지금과 같은 2층 벽돌집 건물로 재건되었으며, 건축 설계는 전광헌과 독립문을 설계한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담당했습니다. 1904년 덕수궁 대화재가 발생하여 대부분 궁궐 전각이 소실되었습니다. 고종은 거처를 옮겨 정사를 논하고 귀빈을 접견하는 편전으로 수옥헌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수옥헌은 이때부터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름도 수옥헌을 중명전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습니다, 고종은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될 때까지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을사늑약 체결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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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 체결 장소

 

대한제국은 각국과의 외교관계를 통해 독립을 유지하고자 했으나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미국, 영국 등 열강들과 협상을 통해 대한제국에 대한 우월한 권리를 확인받고 불법적인 방법으로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게 되는데 당시 제국주의 열강들이 지배하는 냉혹한 국제질서 속에서 힘이 없었던 대한제국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굴욕이었습니다. 이후 대한제국의 주권은 일제에 종속되었습니다.

 

1905년 11월 18일 새벽에 체결된 을사늑약은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입니다. 그 당시 중명전 어전회의에서는 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결의가 있었으나 일제는 군대를 동원하여 중명전을 둘러쌓아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협상을 진행했으며 고종의 승인도 없이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게와 외부대신 박제순이 날인한 것으로 강제 체결된 조약입니다. 을사늑약 체결에 찬성했던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다섯 명을 을사오적이라고 합니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의 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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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을사늑약 반대 운동 자료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된 후에 고종은 강제 체결된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알리기 위해 선언문을 작성하여 영국 기자 더글라스 스토리에게 전달하였으며 영국 신문에서는 고종의 을사늑약 무효 선언문을 보도되었습니다.  1907년 대한매일신보에서도 이를 보도하여 국내에도 알려졌습니다. 또한 고종은 친서를 작성하여 여러 나라에 보냈으며 1907년에는 을사늑약의 무효와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습니다. 이를 핑계 삼아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을 압박하여 양위를 강요했습니다. 고종은 황태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고 양위를 거부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양위로 공식화하고 1907년 7월 27일 순종의 황제 즉위식을 강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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