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은 사도세자. 장희빈. 대장금 등 조선왕실에서 일어났던 여러 사극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며, 일제 강점기 조선왕조 궁궐인 창경궁이 동물원인 창경원으로 격이 강등되는 수모를 겪었던 우리의 아픈 역사가 있는 궁궐입니다. 해방 후에도 40여 년 동안 창경원으로 불렸으나 1980년대 궁궐 복원을 시작하면서 원래 이름인 창경궁으로 이름을 되찾았습니다.
창경궁이 지어진 내력
2022년 9월 1일 조선왕조 궁궐 중 세 번째로 지어진 창경궁을 다녀왔습니다. 창경궁은 1484년 제9대 성종이 세분의 대비이신 할머니 정희왕후, 어머니 소혜왕후 작은 어머니 안순왕후가 편히 지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수강궁을 확장하고 이름을 창경궁으로 바꾸었습니다. 수강궁은 제4대 세종이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궁궐입니다. 창경궁은 왕이 정사를 돌보기 위해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세분 대비를 모시기 위해 별궁으로 지어져 전각의 수가 많지 않으며 다른 궁궐과는 다르게 공간의 배치도 일직선 축이 아니라 지형에 거스르지 않고 터를 잡아 자연스러우며 소박하고 아담한 궁궐입니다.
남향인 경복궁, 창덕궁과 다르게 동향으로 지어져 있으며 이웃 창덕궁과 함께 동궐로 불렸습니다. 창경궁도 다른 궁궐들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며 광해군 때 중건되었습니다. 그러나 1907년 순종 즉위 후 일제에 의해 급속히 변형되기 시작하였으며 1910년 이후 일제 강점기에 결정적으로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창경궁 정문 홍화문은 조선시대 임금과 백성이 소통한 문
홍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입니다. 홍화는 '조화를 넓힌다'는 뜻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 중층 우진각 지붕 형태로 지어졌습니다. 홍화문은 경복궁 창덕궁 정문과는 다르게 동쪽 방향입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1616년 광해군 때 중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대한민국 보물 제383호입니다.
홍화문은 조선시대 임금과 백성이 소통했던 문으로 영조 때에는 균역법 시행에 대한 찬반 의견을 백성에게 직접 물어본 곳이며, 정조는 어머니 해경궁 홍 씨의 회갑을 기념하기 위해 백성에게 쌀을 나누어 준장소로 '홍화문 사미도'에 그 당시 모습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창경궁의 금천교는 옥천교
모든 궁궐에는 법전이 있는 궁궐 내부로 들어가기 전 지나가야 하는 다리가 있는데 금천교라고 합니다. 그 밑을 흐르는 물을 금천이라고 하며 법전이 있는 궁궐 내부와 외부의 공간을 구분하기 위해 일부러 만든 물길입니다. 사악한 기운이 궁궐 내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금천교를 통과하는 모든 신하들은 궁궐로 들어가기 전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라는 의미도 담긴 다리입니다.
창경궁의 금천교는 정문 홍화문을 지나 명정문 앞에 있는 다리를 말하며 옥천교라고 부릅니다. 옥천교는 1484년 성종 때 창건 당시 만들어진 다리로 50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으며 옥천교 밑으로는 춘당지에서 흘러오는 물인 금천이 흐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보물 제386호입니다.
창경궁의 명정문은 정전인 명정전의 출입문
명정문은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입니다. 명정문도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과 마찬가지고 동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1616년 광해군 때 중건되었으며 현존하는 궁궐 정전의 정문중 가장 오래된 건물입니다. 현재 단청 보수공사로 명정문은 지나갈 수 없습니다. 공사기간 2022.07.01~2023.02.23
창경궁의 정전 명정전
명정전은 2단의 월대 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 팔작지붕 단층 건물로 중층 건물인 경복궁과 창덕궁에 비해 격이 낮으며 지세 흐름에 맞춰 자연스럽게 건물을 짓다 보니 정문인 명정문과 축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명정전 조정에는 품계석이 세워져 있으며 박석도 깔려있으나 일제에 의해 훼손된 것을 복원공사를 하면서 화강암으로 만들어 깔아 놓은 박석입니다. 왠지 원래의 박석에 비해 자연스럽지가 않습니다.
명정전으로 들어가기 위해 올라가는 어도에는 답도가 2곳 있으며 답도 상면에는 봉황이 새겨져 있습니다.
명정전은 창경궁의 정전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1616년 광해군 때 중건되어 400여 년의 예전 모습을 지금까지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궁궐 정전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대한민국 국보 제226호입니다.
명정전은 왕세자 책봉식, 신하의 하례, 궁중연회 등 왕실의 공식적인 행사가 치러진 곳입니다. 명정전 중앙에는 어좌가 놓여 있으며 어좌 뒤에는 일월오봉도 병풍이 놓여 있습니다. 명정전 내부를 처음 보는 순간 너무 낡아 보였지만 400여 년 전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어 그 당시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창경궁 명정전 내부 어좌 위쪽 천장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봉황이 오색구름과 함께 금박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조선 12대 임금 인종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했으며 66세의 영조가 15세의 정순왕후를 맞이하는 가례식이 이곳 명정전에서 치러졌습니다.
창경궁 문정전은 임금의 집무실로 편전이며 사도세자 임호화변의 현장
1984년 중건된 새 건물로 기둥은 원형이 아니고 네모난 기둥입니다. 일반적으로 궁전은 정전 뒤에 편전이 있으며 정전과 편전은 일직선상에 놓여 있는데 창경궁의 문정전은 남쪽 방향이며 정전인 명정전은 동쪽 방향으로 서로 직교하고 있습니다.
창경궁 문정전은 임금의 집무실로 편전입니다. 임금이 신하들과 회의를 하고 국가 정책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던 곳입니다.
내부는 칸막이가 없으며 하나의 공간으로 뚫려 있고 실내에도 단청을 칠하여 화려하게 치장했습니다. 임금님 어좌는 원래 단 위에 있어야 하는데 복원할 때 재현하지 못했으며 모든 것이 새것이다 보니 뭔가 친근감이 덜한 것 같아 아쉬웠습니다.
창경궁의 문정전은 임호화변이 시작된 곳으로 사도세자가 문정전 앞마당에서 뒤주에 갇힌 뒤 근처 선인문 앞 뜰로 옮겨져 8일 동안 더위와 굶주림에 신음하다 28세 나이에 죽음을 맞았다는 조선왕실 비극의 현장입니다.
창경궁 선인문 앞 근처에 있는 회화나무입니다. 뒤뜰 린 회화나무 모습이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몸부림치는 모습을 표현한 회화나무라고 하는 말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창경궁 숭문당 현판은 영조 임금 친필
창경궁 숭문당은 1830년 순종 때 중건되었습니다. '학문을 숭상하는 집' 이란 뜻으로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와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이며 왕이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을 접견하고 연회를 베풀기도 했던 곳입니다. 숭문당 현판은 영조 임금 친필입니다.
창경궁 함인정은 편전으로 사용
함인정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정사각형 구조를 하고 있는 정자입니다. 기둥은 바깥쪽 12개 안쪽 4개 를 세웠으며 사방에 벽체나 문을 달지 않아 시원하게 개방되어 있습니다. 꽃무늬 단청을 칠해 화려하게 장식했습니다.
창경궁 함인정은 1833년 순조 때 중건되었습니다. 함인은 '어짊에 흠뻑 젓는다'는 뜻이며, 빈양문을 통과해 창경궁 외전에 서 내전으로 들어서는 확 뜨인 넓은 공간에 위치하고 있어 임금들은 이 정자를 편전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과거에 급제한 자들 접견장소나 경연이나 간단한 의식을 행하는 장소로도 사용되었으며 풍년을 기원하는 가곡제 그리고 농민들을 불러 모아 농사일에 대해 물어보기도 했던 장소입니다.
창경궁 빈양문은 명정전 후문
빈양문은 명정전의 후문입니다. 빈양문은 창경궁 외전과 내전을 구분하기 위해 국왕의 공적 공간인 명정전과 사적 공간인 내전을 연결하는 문으로 '밝음(왕)을 공경히 맞이한다'라는 뜻입니다. 명정전 뒤 빈양문으로 연결된 회랑을 지나면 빈양문
앞마당이 나타나는데 정면 벽은 창덕궁과 경계벽이며, 오른쪽 건물 정자는 함인정입니다. 1980년대 복구된 문입니다.
창경궁 경춘전은 대비 & 왕비 세자빈 침전
창경궁 경춘전은 성종께서 어머니 인수대비 소혜왕후를 위해 지은 건물로 대비의 침전이었으나 왕비나 세자빈도 사용했습니다. 경춘은 '햇볕 따뜻한 봄'이라 는 뜻이며 현판 글씨는 순조가 직접 쓴 어필입니다. 이곳에서 정조. 헌종이 탄생했으며 인수대비 소혜왕후 해경궁 홍 씨가 승하한 곳입니다.
창경궁 환경전은 왕실내 최고위급 남성들 침전
창경궁 환경전은 침전으로 주로 왕과 왕세자 등 왕실내 최고위급 남성들이 많이 사용했던 건물입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며 광해군 때 중건되었으나 다시 화재로 불탔습니다. 1830년 대 다시 복구되었으며 일제 강점기 때 환경전을 이왕직 박물관 전시실로 사용하여 외부와 내부가 많이 손상되었습니다. 현재는 복원되어 본채만 외따로 있지만 원래는 다른 궁궐의 전각들처럼 주위에 건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중종 임금이 이곳에서 승하하였으며 소현세자 빈전이 있던 장소입니다. 원래는 침전이었으나 조선 후기 왕실의 상. 장례 장소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중종이 마지막까지 의녀 대장금에게 자신의 몸을 맡겨 치료를 받던 곳도 환경전입니다. 환경전의 환경은 '기쁘고 경사스럽다'는 뜻으로 편전 글씨는 순조 임금의 글씨입니다.
창경궁의 통명전은 중전의 처소
창경궁 통명전은 중전의 처소입니다. 통명은 '음과 양이 통하여 하늘의 밝은 빛이 비친다'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창경궁 안에 있는 으뜸 전각으로 월대가 있으며 마당에는 박석도 깔려 있습니다. 내전의 중심 공간으로 가장 큰 건물이며 격이 높은
전각입니다. 창덕궁 대조전과 마찬가지로 용마루가 없으며 왕과 왕비의 처소이면서 연회 장소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창경궁 통명전 1/100 모형입니다. 점자로 되어 있어 시각 장애인들이 손으로 만 저서 읽을 수 있습니다.
창경궁 통명전 전각 옆에 네모난 연지가 있으며 돌 난간으로 둘러 저 있습니다. 뒤에는 열천이 있으며 돌로 쌓아 단으로 만들어진 정원도 있습니다. 열천은 영조께서 '이가 시리도록 맑고 차가운 물'이라 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숙종 때 '무고의 옥' 이 일어났던 장소로 장희빈이 통명전 주위에 흉물을 묻어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하다 발각되어 통명전 앞에서 사약을 받게 되는 조선왕실 비극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창경궁 양화당은 대비의 침전 & 왕실 최고위급 머물던 장소
창경궁 양화당은 대비의 침전이지만 왕실내 최고위급 사람들이 머물던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통명전 옆 동쪽으로 통명전과 나란히 있습니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했다가 돌아와 이곳에 머물며 신하들과 사신을 접견하는 장소로 사용했습니다.
1834년에 중건되었으며 일제강점기 때 이왕직 박물관 전시실로 사용되는 등 많이 훼손되었으나 1990년 대 복원되었습니다. 양화는 '조화로움을 기른다.'는 뜻이며 현판은 순조가 직접 쓴 글씨입니다.
창경궁 영춘헌과 집복헌
영춘헌은 침전 건물이며 정조 임금이 독서실 겸 집무실로 사용하면서 자주 머물렀던 곳으로 이곳에서 49세 나이로 승하하셨습니다. 집복헌은 창경궁에 있었던 후궁들의 처소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곳이며 이곳에서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태어났으며 후궁 수빈 박 씨 사이에서 순조가 탄생했던 장소로 영조 임금에게는 많은 애착이 가는 곳입니다. 현재 영춘헌과 집복헌은 1834년 순조 때에 중건된 건물로 두 건물이 서로 유기적으로 지어져 연결되어 있으며 집복헌은 영춘헌의 부속건물 형태가 되었습니다.
관람정보
관람시간
●09:00~21:00(마지막 입장은 20:00까지)
입장은 관람 마감시간 1시간 전까지 입니다.
매주 월요일은 창경궁 휴궁입니다.
관람요금
●어른(만 25~64세) 1000원
무료 만 24세 이하(내국인), 만 65세 이상(내. 외국인)
교통편
●지하철 4호선 혜화역 4번 출구 978m 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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